화성 제암·고주리 학살사건은

일제가 3.1운동을 가장 극악무도하게 탄압한 사건 중의 하나이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국제사회로부터 비인도적 식민 통치 방식에 문제 제기를 받는 등 커다란
비난에 직면하였다.

1919년 3월 31일 발안 장날 시위와 4월 3일 우정·장안면의 격렬한 시위가 일어난 후,
발안 지역은 주요 경계 대상이었다.
이에 만세 시위를 진압하고 이 지역 일대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4월 13일 아리타 중위가 이끄는
일본군 제20사단 보병 79연대 소속부대가 파병되었다.

아리타는 4월 15일 오후 부하 11명을 인솔하여, 일본인 순사 및 순사보 조희창 등과 함께
발안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던 사사카의 안내를 받아 제암리로 향했다.
마을에 도착한 아리타는 조희창과 사사카를 내세워 마을의 성인 남성들을 제암교회로 불러 모은 후,
교회당을 포위하고 집중사격을 가하였다.
탈출하려는 사람들도 무차별 총격을 가해 참살하였다. 이어서 교회당을 방화하고 동네를 돌면서
집집마다 불을 놓았다. 제암리 30여 채가 잿더미가 되었고, 마을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제암리에서 주민들을 참살한 아리타 중위와 소속 부대원들은 곧바로 팔탄면 고주리로 향하였다.
고주리는 제암리에서 불과 10분 거리밖에 안 되는 가까운 마을이었다.
이들은 김흥열의 집으로 들이닥쳐 김흥열을 비롯하여 집안에 있던 일가족 6명을 짚단과
나무로 덮어 놓고 석유를 뿌린 후 생화장을 했다.

1959년, 불타 없어진 제암교회 터에는 ‘삼일운동순국기념탑’이 섰고,
순국한 29인은 현재 제암리 순국선열 합동묘역에 안장되어있다.
화성시는 2016년부터 4.15 제암·고주리 학살사건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제를 진행하고 있으며, 2021년 온라인 추모관을 통해
시민 모두가 화성독립운동사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고,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을 되새기는 기회를 제공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